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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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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구(金舜九 : 1867~1919)
김순구 선생은 3.1운동 때 옥사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선생은 1867년 10월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 마고실촌에서 고려 가야후손인 아버지 만화와 암동김씨 참봉 창수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7년 잉태 중에 아버지를 여의고 유복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휘는 순구, 호는 검한재로 불리었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인 관성의 국방상 중요한 변방지인 마고촌은 군사 전략을 논의하던 곳이었으며 군비를 저장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관성은 신라와 치열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지금 옥천이며 그 당시 군서면을 ‘서화’라 했고, 하동리의 일부를 ‘마고촌’이라고 불렀다.

김순구 선생은 3.1운동 때 옥사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선생은 1867년 10월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 마고실촌에서 고려 가야후손인 아버지 만화와 암동김씨 참봉 창수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7년 잉태 중에 아버지를 여의고 유복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휘는 순구, 호는 검한재로 불리었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인 관성의 국방상 중요한 변방지인 마고촌은 군사 전략을 논의하던 곳이었으며 군비를 저장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관성은 신라와 치열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지금 옥천이며 그 당시 군서면을 ‘서화’라 했고, 하동리의 일부를 ‘마고촌’이라고 불렀다.

김순구 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효도가 지극하며 사리가 분명하고 행실이 바르면 착실하였다. 키다 장대하고 머리가 크며 얼굴이 잘 생겼으며 용모가 단정하여 어른들의 칭송이 이웃마을까지 자자했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권한이 일본의 손으로 옮겨가자 김순구 선생은 나라 잃은 슬픔에 한을 품고 단식을 하였다. 1910년 8월 문의, 청주, 회인, 괴산으로 다니며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일본에 항거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1월 고종 황제의 돌아가심이 왜놈들이 꾸민 흉계임을 알자 온 국민이 분노하였다. 이 때 김순구 선생은 왜적에 항거하면서 그동안 규합했던 동지들과 더불어 1919년 3월 19일 옥천읍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5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몇몇 동지들의 사후에 있을 일이 걱정되어 몇 개소에 ‘대한독립만세’라는 벽보를 써 붙이고 시위운동의 태세를 갖추었다. 1919년 4월 8일 선생의 고향 서화의 중심지인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 안산에서 그동안 청주, 문의 등에서 규합한 동지와 마을 사람들 약 500여명을 지휘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부르고 횃불 시위를 벌였다.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때 옥천 경찰과 헌병대에서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중을 임시 해산 하였다. 다음날 새벽 고향을 떠나 회인, 문의, 청주, 괴산 등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모의하고 독립운동의 장기화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8일 밤 식장산에서 용솟음치던 만세 소리와 횃불 시위는 옥천 경찰서와 헌병대 그리고 대전 헌병대가 합세하여 군서면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선생과 동지들 대부분이 떠난 뒤였다. 이에 일제는 선생의 고향 주변 동지들을 옥천경찰서에 구속시켜 모진 고문을 행하였다.

1919년 6월 5일 고향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갖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순구 선생은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였다. 자진 출두한 선생은 분노하여 고함을 치며 항의 하였다. 조국을 잃은 철천지한(徹天之恨)을 풀 길 없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 경찰의 무모함을 힐책하였다. 이에 포악한 왜놈 경찰들은 혹독한 매질과 모진 고문으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 할 정도의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선생은 만신창이로 의식 불명이 된 채 1919년 6월 13일 공주 지방 검찰청으로 압송되었다.

검찰은 악랄한 취조 끝에 충청도 일원과 각지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선생을 그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밝혀냈다. 그리하여 공주 지방 법원에서는 1919년 6월 18일 판결 번호 대정 8년 제39호로 죄명은 ‘정치범 처벌령 위반인’으로 징역을 언도하였으며, 혹독한 고문과 형벌 끝에 1919년 6월 28일 향년 53세의 일기로 공주 감옥에서 고귀하고 거룩하신 생명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 하셨다.

선생의 묘소는 군서면 하동리 마고촌 안산에 모셔져 있으며, 1946년 선생의 애국 애족의 거룩한 정신을 추모하며 면민 일동이 순절비를 세워 군서면 하동리 옥녀봉 도로변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또한 2007년부터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주최로 그 뜻을 기리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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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