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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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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庾軾 : 1586~1650)
조선조 인조때 인평대군의 사부였던 유식 선생께서는 1586에서 1650년간에 계셨던 분으로,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중봉 조헌 선생의 추증상소문을 지어 올렸으며, 굳은 지절로 폐모론(인목대비폐비론) 반대 주장 등의 의로운 선비로서 우암 송시열, 동촌 송준길, 초려 이유태 등 당대의 거유 등과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우리고장의 대유학자이다.

조선조 인조때 인평대군의 사부였던 유식 선생께서는 1586년에서 1650년간에 계셨던 분으로,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중봉 조헌 선생의 추증상소문을 지어 올렸으며, 굳은 지절로 폐모론(인목대비폐비론) 반대 주장 등의 의로운 선비로서 우암 송시열, 동촌 송준길, 초려 이유태 등 당대의 거유 등과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우리고장의 대유학자이다.

휘는 식(軾), 자는 자경(子敬), 호를 덕곡(德谷)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옥천군 안읍현(안남면 덕곡리 덕실)에서 생장(生長)하였고 두 살 때에 이미 문자를 해득하셨다고 한다. 효성이 또한 지극하여 정성지례(定省之禮, 지극정성으로 부모님을 살피고 봉양), 고면지규(故面之規, 부모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자상한 보고를 드림)를 다하였다고 한다.

광해군 시절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서울에 가서 삼각산의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몇 흉도(과격분자)가 찾아와 이른바 폐모론에 가담해 줄 것을 종용하고 협박하였으나, 일체 응하지 않고 굳은 지절을 지키시어 고향인 덕실로 귀향하였다.

유식 선생은 중봉 조헌 의병장의 업적을 선양하고, 그 행정과 충렬을 세상에 밝혀 후세에 전하고자, 그 유명한 추증상소문(追增上疏文, 임금께 어떤 훌륭한 분의 업적을 보고하여 그 분의 벼슬과 명예를 수여하자는 글)을 쓰셨다. 그 당시 호서 일대에서 모인 석학들이 써낸 상소문 가운데에서, 유 사부공의 상소문이 유독 휼륭하여 사계 김장생이 극찬을 하며 채택한 뒤에 상소를 올린 바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칙명이 내리고, 중봉의 업적을 선양하는 각지의 유적물도 또한 이에 연유된 바 크며 오늘날 우리 세대에 와서 중봉충렬제를 거행하기까지 이르렀다.

1633년에 공은 우암 송시열 선생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시었고, 1640년에 인평대군의 사부로 제수되시어 학식과 덕망을 유감없이 발휘하시었다. 그 후, 군기시주부(종6품), 장례원사평(정6품)을 역임하였으며, 지방관으로 나가 행(行) 목천 현감으로 재직시에는 청백리(淸白吏) 목민관으로, 몸가짐을 얼음같이 맑고 차게 하시어 만인의 모범이셨다. 얼마 아니되어 사건에 계류된 후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덕양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이시다가 1650년 65세 일기로 정월 7일 타계하셨다.

조선 인조때 인평대군의 사부이셨던 덕곡 유식 선생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전국의 대기근, 정유재란, 영창대군의 죽음, 인목대비 서궁유폐 그리고 인조반정, 이괄의 난에 이어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국치, 세자 일행의 청나라 인질로 심양행 등 나라의 존망을 뒤흔들만한 역사적 사건들이 실로 숨가쁘게 연이어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 시대이다. 이런 국운의 격변기에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으니 백성들은 누구나 자기 목숨하나 보전하기도 어려웠을 대혼란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덕곡선생은 오직 학자와 선비 정신으로 학덕을 쌓으시어 대군의 스승으로 또 난세를 헤쳐나가는 지도자로서 평생을 깨끗이 살으셨으니, 오늘날에도 공의 행실은 본받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상을 탈 없이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낸 선비중 선비였다. 그 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덕으로 감화시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바른길을 모색하고, 또 이끌어 가며 어려운 풍진 세상을 넘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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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