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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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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郭垠 : ~149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이요 성은 곽씨이다.

휘(諱)는 은(垠)이요, 자는 안부(岸夫)이며, 호는 용촌(龍村)이다. 고려조에 문하시중 평장사 선산군 휘(諱) 우현(佑賢)의 십일대손이다. 모친은 진산진씨이며, 곽은 선생의 생년월일은 기록된 곳이 없다.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이요 성은 곽씨이다. 휘(諱)는 은(垠)이요, 자는 안부(岸夫)이며, 호는 용촌(龍村)이다. 고려조에 문하시중 평장사 선산군 휘(諱) 우현(佑賢)의 십일대손이다. 모친은 진산진씨이며, 곽은 선생의 생년월일은 기록된 곳이 없다.

곽은(생몰년 미상)은 조선 성종때 문신으로 1465년 (세조11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472년(성종3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문과 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담양부사 등을 지냈다.

1472년(성종 3)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교(檢校)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1년에 지평이 된 뒤 헌납‧전적‧장령을 거쳐 1484년에는 전설사수(典設司守)가 되었다.

1487년에 담양부사에 특명으로 임지에 부임하였다. ‘담양부사가 다스리기 어렵다’ 하여 상감이 선별하여 특병으로 제수되었다.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 빙벽의 절조가 전후에 비할 바 없었고 선정덕치(善政德治)로 치적이 전국제일이었다. 양사제기문(養士齊記文)을 지어 인재를 양육함에 힘썼으며 향교에 보(寶)를 설치하여 흥학(興學)의 기반을 마련하여 가난한 선비를 육성함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백성의 노역을 가볍게 하고 조세를 적게 하며, 교화(敎化)를 밝게 하고, 예속(禮俗)을 도타히 하며 사람들을 사랑함에 성심에서 나오니 부민이 진실한 사랑으로 추대 존경하였다. 1491년 동부승지로 특승(特陞)되었으나, 관아에서 급서 순직(殉職 )하니 담양 부민들이 애통 망극하여 부모가 돌아가시어 상을 당한 것처럼 주육(酒肉)을 금하고 조상(弔喪) 하였다. 절의에 바르기로 유명한 남효온(南孝溫)도 그 죽음을 슬퍼하는 글을 지어 후세에 남겼고, 이이(李珥)도 그의 자손을 현인의 후예라 하여 등용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건물은 성종때 담양부사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용촌(龍村) 곽은(郭垠)의 재실이다. 평면구조는 정면5칸, 측면1칸반의 홑처마팔작집으로 건축형식이 재실로서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치목기법이 잘 나타나 있다. 전면으로는 반칸 정도의 폭으로 마루를 두고, 동측 1칸 온돌방 앞으로는 높은 마루를 두고 별도의 아궁이와 문을 설치하여 원경(遠景)을 보게하였다.이 건물은 16세기 중엽에 건립되어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1894년 중수 후, 1978년 수해로 인하여 복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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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