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언어의 시인 정지용을 만나다.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퇴칸 구조이다.
생가의 전체적인 형상은 ‘ㄱ’자 집이며 마주보이는 방향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ㅡ’자형 창고가 있다.
주거용의 ‘ㄱ’자 집은 부엌 뒤로 방 1칸을 더 내어 ‘ㄱ’자를 이루는 특이한 구조이다.
방 안쪽에 안방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데
길이는 5미터정도이며 꼭 사람하나 지나갈 만큼 좁다.
양쪽 방을 오갈 수 있는 이 통로는
양쪽 방에 문을 달아 폐쇄형이다.
굳이 그 이유를 유추(類推)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전통 가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내외벽(內外壁)의 유래를 들 수 있는데 실제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옛날 반가(班家)에서는 옥상옥(屋上屋)처럼 담장 안에 담을 만들어 내외벽을 쌓았는데, 그것은 여인들을 배려한 특별한 공간이었으며 안사람에 대한 예의를 중시 했던 우리네 풍속이었다.
정지용 생가의 방과 방 사이의 소통로는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내외벽을 언급해 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상(班常)의 구분 없이 금남(禁男)의 구역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부엌이다. 부엌은 여성만의 활동영역이었으며 동시에 취사와 난방을 위한 목적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민가에서는 정지용 생가의 부엌처럼 땔나무와 불쏘시개를 보관 할 수 있는 창고의 용도로 일부 사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정지용 생가의 부엌구조는 민가의 일반적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엌 문 옆을 본다면 돌절구, 나무절구와 공이가 놓여있는 자리 언저리, 이곳이 정지용 생가임을 알리는 표시판을 또 하나 만날 수 있다. 이 표시판은 정지용의 모습과 함께 그의 태어난 년도와 날짜, 생가가 언제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지어졌다는 내용을 동판에 돋을새김 하고 있다.
1988년 정지용의 해금조치가 있은 후 모임이 시작된 ‘지용회'가 생가가 복원되기 전 이곳 어디쯤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붙여놓은 표시판을 기념 삼아 다시 붙인 모양이다. ‘지용회'가 정지용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버리지 않고 아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통의 경우가 장독대는 뒤란에 위치하나 정지용 생가의 장독대는 우물가 담장 밑에 다소곳하다. 우물 옆의 낮은 굴뚝도 눈여겨 볼일. 민가의 굴뚝은 그저 연기만 토해내면 그만이라 돌과 흙을 되는대로 쌓아 만들거나 깨진 항아리나 판자로 굴뚝을 만들어 뒤란에 두는 것이 보통이나 어쩐지 이곳은 우물가 옆이다. 낮은 굴뚝의 연기는 바로 흩어지지 않고 집 마당을 휘돌아 나가기 마련, 연기는 소독기능도 한다하니 그 지혜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그때가 되면
이 생가는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네 정서를 오롯하게 전하는 실체로서 더욱 다가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