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이 일단(一端)으로도 짐작할 만하니
내가 새삼스럽게 장로교 경영의 남녀 학교라든가 병원, 양로원, 고아원이라든가를 열거해야만 할 것도 없이 '선천(宣川)'은 사회시설의 모범자다.
정지용의 '선천답사기(宣川踏査記)의 일부이다.
'선천'은 평안북도에 있는 읍으로서 미국 선교사들이 최초로 선교를 시작한 곳이자 기독교가 번성하였던 고장이다. 그 규모가 어떠했음에 대해 정지용의 시각을 다시 빌린다면 이렇다.
읍을 4소교구로 분할하야 주사 청루(酒肆 靑樓)에 배당한 토지가 없이 되었다.”
더욱이 남교회라는 예배당은
거대한 이층 연와(煉瓦) 건축인데
일천수백명을 앉칠 만한 호울이 2개가 있다.기독교는 미국 선교사들과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선교사업과 함께 교육, 의료사업 등의 활동을 하여 개화기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천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도 종교와 함께 독특한 건축물을 들여오는데 우리는 이를 두고 ‘교회당'이라 지칭 했다. 건축학자들은 이를 ‘미국식 교회 건축'이라 하여 가톨릭성당의 고딕양식과 구분 짓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서의 초기 ‘교회당'은 초가집이나 한옥에서 출발하여 ‘미국식 교회 건축'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발전사에 대해서는 정지용 생가가 있는 구읍 ‘교회당(현재 옥천영광교회의 교육관)'의 경우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다음과 같다.
“본래 초가집교회였으나 기와집으로 개조하였고, 625동란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으며, 교회당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1910년 일제강점기였다.”
이처럼 일찍부터 선진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구읍은 본래 계획대로라면 철도경유지였으나 이곳사람들의 절대적인 반대로 옥천역은 현재의 위치에 설치되고 상권 또한 옥천역 인근으로 이거하게 된다. 그 후론 장(場) 마저 서지 않으니 그 영화의 흔적만 구읍에 남아 있게 된다.
우리의 주거형태와 종교, 상가 시설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기, 625동란기, 경제부흥기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에 따라 급변하게 된다. 정지용 생가 답사 후 마을 구경삼아 구읍을 돌아본다면 그 ‘철로설치 반대사건 덕'에 옛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정지용 생가와 함께 구한말부터 근대까지의 주거변천 모습을 편린(片鱗)으로나마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옥천의 저잣거리라 할 수 있는 현재의 구읍 사거리에 가면 1910년경 들어선 일본식 상가건축물을 보게 될 것이며, 발길을 돌려 ‘구읍우편취급소'에서 ‘교회당'가는 골목 어귀에 다다른다면 벼찧기 위해 모여든 소달구지가 북적이던 당시 옥천 최대의 정미소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