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峰) 조헌(趙憲)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 왜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히고
금산전투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선생은 조선왕조 중기의 문신으로 우리 유학의 도통을 계승한 유학자이며 경제 사상가이자 의병장이다.
고려 말 홍건적을 격파하고 전사한 천주의 후손이다.
과거급제 이후에는
정주,파주,홍주목의 교수와 교서관의 저작,박사를 거쳐 예조좌랑, 통진현감, 공조좌랑, 전라도사, 종묘서령, 보은현감, 공주목교수겸 도독 등을 역임하였다. 보은현감에 재직할 시에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의 목민관의 모범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는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이이에게 수학 하였으며, 특히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스스로 부르기도 하였다.
1584년 겨울 충청도 옥천군 안읍 밤티의 궁벽한 산골로 은거하여 후율정사를 짓고 생애 마지막 7, 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데 힘썼다. 이 시기를 통해 그는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이이를 계승하고자 노력하면서 우리 유학사에 있어 계왕계래(繼往開來)의 확고한 인식과 적극적인 의지를 표방하였다.
일찍이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올린 동환봉사와 더불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상소문들은 모두 이곳에서 구상되고 쓰여졌다. 그는 16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현실인식과 실천적 학문관을 토대로, 정치,교육,경제,군사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론을 제시하면서 철저한 민생의 안정을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경제사상과 실학의 선구적 경향을 고찰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여러차례에 걸친 강직한 상소와 도끼를 들고 올린 지부상소(持付上疏) 등으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는 등 올곧고 강직한 모습을 평생동안 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주로 북상하기 전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대가 흩어지자, 남은 700명의 의병들만을 이끌고 영규와 함께 8월 18일 금산공격을 강행 하였으나 후원군이 없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태로 모두가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비록 조헌선생은 순국하였지만 그와 의병들의 활약으로 왜적들도 심대한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이 회복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의 제해 활동과 함께 다시금 조선이일어설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후 그는
유학을 천명하고 충절의 의리를 실천하여 조선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열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은 조헌선생은 이후 칠백의총 종용사와 우저서원, 표충사, 창주서원, 후율사 등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중봉집>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