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옥천에서 칼을 들다
사후 그의 뼈가 묻힌 땅이다
선조17년(1584) 조헌선생이 보은현감 재직 당시 당쟁은 격심하고 조정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이 때 조헌선생은 반대세력의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파직 당하고 나서 마음을 닦으며 초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조헌선생이 은둔생활을 시작한 곳은 옥천 밤티(栗峙)의 산속이다.
학덕 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문하생을 두고 학문을 강론(講論)하며 지내게 되니
옥천과 조헌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호국의 일념으로 붓 대신 칼을 들고 의병을 일으킨 선비 중봉 조헌. 조헌선생은 율곡 이이, 토정 이지함과 같은 역사적 인물로부터 수학하고 학문을 교류 했을 만큼 학식이 뛰어난 선비이면서 임진왜란의 발발을 예견하고 수차 상소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1584년 겨울 충청도 옥천군 안읍 밤티의 궁벽한 산골로 은거하여 후율정사를 짓고 생애 마지막 7, 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데 힘썼다.
이 시기를 통해 그는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이이를 계승하고자 노력하면서 우리 유학사에 있어 계왕계래(繼往開來)의 확고한 인식과 적극적인 의지를 표방하였다. 일찍이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올린 <동환봉사>와 더불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상소문들은 모두 이곳에서 구상되고 쓰여졌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조헌선생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이후 옥천으로 내려와 지내다가 임진왜란의 발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미 왜란을 예견하고 옥천으로 내려와 스스로 의병이 되어 왜군과 싸울 각오가 되어있었던 조헌선생은 청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옥천으로 내려와 의병모집에 나섰다.
조헌선생이 이끄는 의병의 첫 전투는 인근 보은의 차령에서 왜구와의 격전으로 치러졌으며 이 첫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시키는 성과를 올린다. 이에 힘입어 호서와 영남에 의병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띄워 그 결과 많은 장정이 의병에 합세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옥천은 조헌선생의 고향은 아니나 그가 억울하게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논하고 마음을 닦은 곳이자 구국일념의 의지를 세운 곳이며 초기의병 모집처 이자 사후(死後) 그의 뼈가 묻힌 땅이다.
그런 만큼 옥천은 조헌선생의 자취가 곳곳에 새겨져 있는 고장이다. 중봉의 발자취를 따라 옥천으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