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규(柳承畦 : 1921~1993) | |
소설가 류승규 선생은 평생을 오로지 농촌 농민을 제재로한 작품만을 고집스럽게 써온 한국의 대표적 농민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북면 추소리에서 아버지 류흥열 어머니 정모정 두 분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관향은 문화(文化), 본명은 재만(在萬)이다. 류승규 선생은 지금은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된 옥천 추소리 부수문리, 문화 류씨 집성촌으로 가세는 중농 정도였다. 마을 집안 어른들께 천자문 등을 배우고 옥천보통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그것이 그의 교육의 전부였다. 16세 때에 조부와 부친이 같은 날 작고하고 3년 뒤 어머니가 그 뒤로 큰 어머니가 세상을 뜨는 통에 졸지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 버린 것이다. 1940년 20세까지 영농생활을 하다가 향리를 떠나 1945년까지 회령 종성 함흥 등 북한과 만주 지역을 방랑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수업에 전념했다. 1956년 <자유문학>지에 이무영 선생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 농촌 농민 제재 소설 창작에 일관하여 중단편 <빈농> <두더지> <아주까리> <느티나무>, 장편 <굴욕일지> <애향곡> <푸른벌> 등 150여 편의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주로 가난한 농민의 한과 농촌사회의 구조적 모순, 일제 강점기 농민의 실상을 표출하여 전환기 농민문학을 활짝 꽃피우고 한국 문학사를 빛내었다. 작가 류승규의 농민소설은 70년대에 들어와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는 셈인데 특히 장편 '푸른 벌'(71) 등을 발표하면서 소설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된다. 실제로 류승규는 낙향해서 농촌의 절실한 현실을 집요하게 탐색하면서 문제작들을 출산해 갔다. 몇 해 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그는 1970년에 단편 '농기(農旗)'와 '미친 녀석' 등 일련의 중량있는 농촌소설을 내놓아 문단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농기'는 도시의 경기가 좋다고 해서 자식들은 도시로 훌훌히 떠나버리고 텅텅 빈 집과 농토를 지키고 있는 노농(老農)의 서글픔과 뼈아픈 심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은 논 열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윤호 영감"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이농(離農) 현상을 작품화시킨 것이다. 모두가 떠나버린 고향을 외롭게 지켜온 작가의 심정이 "윤호 영감"의 허탈감으로 동조되고 있다. 20여 년간이나 농촌에서 직접 농사를 생업으로 지낸 류승규 선생에게는 이 경험이 문학 이전에 민족적 수난의 연속이었으며, 가난과 억압의 실감이었다. 이래서 선생의 소설은 다른 농촌소설 작가의 작품과는 달리 “농민의 가난=민족의 비극=사회적 정치적 책임”이라는 절실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류승규 선생은 농촌을 가장 비서정적인 경제 집단으로 파악하여 작품화하고 있으며 이점은 앞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향리에서 필생의 장편소설 <떠꺼머리>를 탈고한 후 1993년 9월 16일 젖은 붓을 던지고 추소리 호반에 누었다. 흙의 작가 유승규 선생은 흙의 문학상, 흙의 문예상 그리고 제1회 한국 농민문학상, 옥천문화대상을 수상하였고 창작집 <농기> <농지> 장편소설 <춤추는 산하> <흙은 살아 있다> <익어가는 포도송이>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99년 6주기에 ‘소설가 류승규 문학비’를 옥천군의 후원으로 한국농민문학회에 세웠고, 2003년 10주기에 ‘류승규문학제’를 개최하고 ‘류승규문학상’을 제정 시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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