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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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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순(任昌淳 : 1914~1999)
우리나라 최고의 한학자라는 별칭을 달고 일생을 살았던 사람.

대한민국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옛 비석에 새긴 글을 해석하고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금석학의 대가라는 별칭에, 한학의 대가, 서예와 미술계에서도 그가 남긴 글은 가치를 인정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일군 업적은 단적으로 우리나라 중원고구려비나 단양적성비 등을 해석해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어떻게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을 전개하였는지 풀어준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몇 번에 걸쳐 문화재위원회 위원과 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한학자라는 별칭을 달고 일생을 살았던 사람, 대한민국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옛 비석에 새긴 글을 해석하고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금석학의 대가라는 별칭에, 한학의 대가, 서예와 미술계에서도 그가 남긴 글은 가치를 인정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일군 업적은 단적으로 우리나라 중원고구려비나 단양적성비 등을 해석해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어떻게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을 전개하였는지 풀어준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몇 번에 걸쳐 문화재위원회 위원과 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창순은 1914년 청산면 법화리 복우실 마을에서 아버지 임원재 선생과 어머니 김영례 여사 사이에서 삼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학교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라며 할아버지가 반대해 다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가세가 점점 기울어 월사금을 내고 학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한 것도 한 이유였다. 대신 그는 열네 살 때인 1927년부터 6년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에 있는 ‘관선정’이라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임창순은 서당을 연지 1년 후인 1927년 서당에 들어가는데 이때부터 6년 동안 여기서 공부를 했다.

그는 해방 후 경북중학교를 시작으로 대구사대와 동양한의과대학, 성균관대학 등에서 교사와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정식으로 받은 교육이 한문 밖에는 없지만 그는 서당에 다니면서도 신문을 보며 틈틈이 사회 인식을 넓혔다. 이렇게 서당을 다니면서도 국어와 국사에 대해 틈틈이 익혀두었던 지식은 해방 후 교원시험에 합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국어과 차석과 국사과 수석으로 교원시험을 통과해 경북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우리나라 한문교육의 산실로 불리는 태동고전연구소를 1963년 설립하였다. 어느날 고려대 졸업생들이 찾아와 한문을 더 배우고 싶다고 요청을 했고, 하루 한 시간씩 장소를 빌려 강의를 시작한 것이 연구소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몇 해를 했는데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한 사람을 뽑아서 장학금도 주고 일정한 연한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선경 최종현 회장이 교육법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지원 해주었고, 1976년 처음으로 다섯 명을 선발해 예정한 교육을 했다. 이후 한림대학교가 1985년 연구소를 운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임창순은 그동안 마련했던 토지, 가옥 및 서적 일체를 그대로 한림대 측에 무상기증하고 연구소를 대학 부설로 하여 소장직책을 갖고 연구소 운영에만 전념하였다.

임창순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역사적인 사실을 밝혀내는데 금석학을 활용해 새로운 활로를 주었다. 금석학의 대가로, 전국 각지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 등 금석문을 해석‧판독했고 <한국 금석집성>(1984)을 펴냈다. 특히 단양적성비 판독은 학계에 큰 공헌을 한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광개토왕비문은 1890년 이전 것을 소장하고 있으면서 학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중원고구려비와 같은 비문을 해석, 판독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한학과 금석문 해석 등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임창순을 정부는 1971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위촉하고 문화재 연구를 하도록 했다. 1985년, 1989년과 1991에도 문화재위원장을 연임하며 지냈고, 82세인 1995년에도 역시 문화재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 문화재 지정 및 관리를 하는 직책을 소화했다.

1998년 경복궁 흥례문을 상량문을 직접 쓰기도 한 임창순은 1999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경기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됐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0주년인 2009년 4월 16일부터 5월 10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는 임창순 선생 작고 10주기를 맞아 ‘연기와 구름같이 거슬림없이 사는 삶’ 임창순의 유묵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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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