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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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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규(郭重奎 : 1891~1950)
1891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출생하였다.

의병활동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한 부친 곽준희를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자주 독립의 뜻을 키웠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복역하였다.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해에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하고 이어 비서장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5월 상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1891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출생하였다. 의병활동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한 부친 곽준희를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자주 독립의 뜻을 키웠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복역하였다.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해에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하고 이어 비서장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5월 상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그 뒤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나창헌, 최석순, 강창제 등과 함께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안을 제출하고, 나창헌을 심판위원장으로 한 탄핵심판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탄핵안을 심리한 뒤 임시의정원에 보고하여 면직 처리케 하였다.

그해 동생 곽중선을 상해로 망명시키고, 부친 곽준희와 형의 뜻을 이어받은 곽중선은 1926년 임시정부의 비밀결사 조직인 병인의용대에 가입하여 대일 비밀결사항전을 펼친다. 1926년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 307호 명성사진관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의 비밀 연락장소로 제공하였다. 1929년 상해 프랑스조계로 이사하여 성광 사진관을 개업,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활동케 하였다.

이어서 1931년 9월부터 윤봉길을 사진관에 은신 기숙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해의 지리와 풍습을 알려주고 장차 거사를 대비케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의 간부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집행 위원에 선출되어 공산당과 제휴하면서 강소성 법남구지부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피체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뤘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천진에 있는 동생 곽중혁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년 9월 상해의 가족들과 비밀연락을 취하던 동생 곽중선이 괴한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동생의 죽음에 애통해 하였으나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1938년 석가장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러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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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