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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옥천읍 죽향리
죽향리(竹香里)는 원래 옥천군 읍내면(邑內面) 저전리(楮田里)와 고증개리(高增介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천읍 문정리와 죽향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이름유래

죽향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강점 후 여러 마을을 합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 때, 마을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마을 앞에는 큰 향나무가 있다 하여 죽향리라 이름 지었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기록에 의하면 읍내면 저전리에 136호, 고증개리에 42호가 살았다.
  • 1891년 : 신묘장적에는 저전리에 136호, 고증개리에 40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1910년 : 행정구역을 일제히 조정하면서 군남면과 읍내면을 합쳐 군내면이라 부르게 되면서, 저전리를 문정리와 죽향리로 나누고 고증개리는 죽향리에 합하였다.
  • 1917년 : 군내면이 옥천면을 옥천면으로 개칭
  • 1949년 : 옥천읍으로 승격되었고, 죽향리는 옥천읍에 속해 있었다.
마을이야기
조선 말엽까지 죽향리에는 관아와 시장이 있는 등 문정리, 상계리와 함께 옥천군의 중심지였다. 죽향리와 문정리 일대를 구읍이라고 부르는 것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현재의 금구리, 삼양리 등 신읍이 발전하면서 구읍지역이 쇠퇴하면서다. 근대화시기 옥천에 살던 경상도 갑부 김기태가 지었고 살았다는 한옥(현 마당넓은 집)은 오대리 보내의 한씨가 1944년 구입한 후 기증해 1964년까지 20년간 옥천여중 건물로 쓰였고, 이 한옥 옆에는 문화재 가치를 지닌 석빙고가 남아 있다.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충북인력개발원은 예부터 잣나무를 많이 심어 잣밭산이라고 했던 산에 위치해 있으며, ‘가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가리뱅이재’로 불렸던 잣밭산 고개는 죽향리에서 군북면 용목리로 넘는 큰 고개였다. 전해오는 말로는 조선 말엽 죽향리에서는 크고 작은 재앙이 연이어 일어나 주민들이 매우 불안해 했는데, 동네 서쪽에 돌사람과 돌짐승을 세우면 편안해진다는 한 선비의 말을 듣고 돌사람과 돌사자를 만들어 세웠다. 이후 마을을 안정됐고, 마을 수호자 구실을 했던 돌사자 등은 2005년 도난당한 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이 돌사자가 세워져 있던 곳은 죽향리 절터로, 이곳에 있던 삼층석탑을 약 70년 전에 죽향초등학교에 옮겨다 놓았다고 전한다. 죽향리에 있는 탑산사는 500여년 전에 지었다하며 절에 있는 여근, 남근석 느티나무 두 그루는 군 보호수로 지정됐다.
마을의 인물
죽향리 출신 전좌한(全佐漢, 1899∼1986)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김응선 지사와 함께 ‘서울 주요 관청 폭파 미수사건’을 주도했다. 어려서부터 항일투쟁에 나서 독립선언문을 인쇄, 살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선전하는 혈서를 붙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다 체포된 전 지사는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한 후에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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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옥천읍
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