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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정보
마을이야기
군북면 용호리
용호리(龍湖里)는 원래 안내면 화일리(회일)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용호리라 고치고 행정구역도 안내면에서 군북면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이름유래

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 조정하면서 안내면 용호리라 이름을 바꾸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내면에서 군북면으로 그 관할이 바뀌었다. 용호리는 쑥마루 마을 강가에 큰 늪이 있어 이 늪에서 용 이 올라갔다는 전설에 따라 용호라 하였는데 한자로 마을이름을 지을 때 용호리라 하였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안내면 화일리라 하여 14호가 살았다.
  • 1891년 : 신묘장적 기록에는 25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마을이야기
수백년 묵은 흑색 이무기와 황색 이무기가 한쌍을 이루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용호소는 옛부터 군내에서 대표적으로 기우제를 지내온 곳이다. 가뭄이 들면, 옥천군수가 기우제를 지냈고, 주민들도 용호소에 가서 키로 물을 떠서 까불렀다. ‘날궂이’ 의식을 통해 비가 오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시점이면 당시는 안내면 이었던 용호리 주민들과 석호리 주민들이 줄다리기를 벌였다. 이와 같이 기우제를 지낸 후 마을은 그해에 가뭄이 안 들고 물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전해오기 때문이었다. 마을에는 방개와 꽃산이 등에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파주염씨(坡州廉氏) 세거지로, 마을자랑비와 염씨사당인 용강사(龍江祠)가 있어 해마다 파주염씨들이 들어와 수몰된 고향을 지켜가고 있다. 금강과 어울린 경관이 수려해 예부터 용호8경을 노래했던 곳이다. 마을이 쇠퇴함에 따라 석호리에 통합되었다.
마을의 인물
죽향리 출신 전좌한(全佐漢, 1899∼1986)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김응선 지사와 함께 ‘서울 주요 관청 폭파 미수사건’을 주도했다. 어려서부터 항일투쟁에 나서 독립선언문을 인쇄, 살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선전하는 혈서를 붙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다 체포된 전 지사는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한 후에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마을의 명소
마을에는 두기의 선돌이 세워져 있다. 선돌 한 기에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이라고 써 있다. 마을에서 귀신을 쫓는 구실을 했던 선돌이다. 마을이 수몰됨에 따라 주민들이 옮겨다 놓은 것이다. 또 한기는 모양은 선돌처럼 생겼고, 군에서도 비지정문화재로 관리하는 안내판을 세웠으나 일부 주민들은 선돌이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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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군북면
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