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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동이면 평산리
평산리는 본래 이남면(利南面)에 속해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이름유래

소도는 원래 바드리로 한자화 하면서 그 뜻을 따서 소도(所道)라 부르게 되었다. 평산리는 들 가운데 있는 산이란 뜻으로 들미, 들뫼라 부르던 것을 한자화 하면서 평산(坪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바드리 주변에는 분무골, 약물내기, 검지내, 증갱이, 뒷골, 쑥고개, 노송골, 시거리, 띠마루가 있다. 마을회관 주변으로 공판재, 한양 과거길 있었던 큰고개, 뒤깎음, 검지내, 집너머, 분무골, 다락바, 시거리, 움묵재, 아랫검지내, 학교날망이 있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77호가 살았다.
  • 1891년 : 신묘장적의 기록에 의하면 소도리(所道里)라 하여 9호에서 15세 이상 48명이 살았다.
  • 1910년 : 일제강점기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이남면(伊南面)을 이남일소(一所), 이남이소(二所)로 나누어 평산리는 이남이소면 관할로 되었다.
  • 1914년 : 4월 1일 동이면(東二面)이 새로 생기면서 평산리와 소도리를 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이야기
평산리에는 옥천농협 농산물가공공장을 비롯하여 11개의 기업체에서 123명이 종사하고 있다. 1997년 7월에 큰 비가 내렸는데 성골에 6.25당시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의 유골이 도로변에 모습을 드러내 6.25의 참상을 회생하게 한 상흔의 자리로 기억되고 있다. 이 마을은 성주이씨(星州李氏) 집성촌으로 8세조인 성종16년(1485년) 출생한 이석현(李碩賢)공이 낙향한 후 약500년을 이어 살아온 곳이다.
마을의 명소
마을뒷산에는 망북비가 있는데 이 비석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성주이씨 문중의 이기윤(李箕允) 선생이 북향통곡하고 그 통한의 정을 “太皇帝崩 日月無光 臣民罔極 如喪孝?”(태황제가 돌아가시니 해와 달이 빛을 잃었구나 온 국민이 상을 당하니 망극하도다.) 라고 새겨 1920년에 세운 비이다. 비석 말미에 건국 529년 이라는 조선건국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일왕의 연호를 쓰지 않고 조선개국 연호를 사용하여 투철한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깃들어 있는 비이다. 1936년 4월 20일 개교하여 지금까지 많은 학생들을 배출한 동이초등학교가 위치한 성골(서원골)에는 1571년 서희여가 세운 쌍봉서원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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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