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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정보
마을이야기
군서면 월전리
월전리(月田里)는 원래 군서면 서정자리(西亭子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천읍 서정리(西亭里), 옥각리(玉覺里)와 월전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이름유래

월전리라 부르게 된 것은 월곡(月谷, 다리골)과 군전이(軍田)을 합하면서 월곡의 월 자와 군전 의 전 자를 한자씩 취하여 월전리라 하였다. 월곡은 “다리골”의 옛말을 한자로 쓰면서 월곡이라 하였는데 옛말의 뜻은 “다리” 는 고어로 “들” 이란 말로, “들이 넓은 골”이 된다. 이곳의 지형을 보아도 냇가에 위치한 들이 있으므로 옛이름이 맞는다 하겠다. 군전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간에 치열한 전쟁이 있을 때 군대가 많이 주둔하였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 한다. 이 마을 앞에는 “구진벼루”가 있어 백제의 26대 성왕이 전사한 곳으로 보고 있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군서면 서정자리라 하여 110호가 살았다. 이때는 서정리, 옥각리, 월전리를 관할하였다.
  • 1891년 : 신묘장적의 기록에 의하면 군서면 월이동리에 17호가 살았다.
  • 1908년 : 군,면을 조정하면서 군서면을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으로 나누었으며, 월이동리(月伊洞里)는 일소면에 속했다.
  • 1914년 : 행정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정하면서 일소,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서면이라 부르게 되고, 이때 월이동리가 월전리로 되었다
마을이야기
백제의 중흥을 내건 성왕은 고구려에 맞서 신라, 가야와 함께 551년 한강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는 사이,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이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내는 등 외교적 유화책을 썼으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554년 7월 국운을 건 싸움인 관산성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쟁에서 성왕은 구진벼루에서 목숨을 잃고 고리산성에 주둔하던 태자 여창(후에 위덕왕)은 간신히 빠져나갔다. 관산성전투 결과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운을 건 싸움터인 월전리의 중요성은 부각된다. 월전리를 중심으로 군대가 주둔했다고 해서 군전, 시체를 염하는 곳이라 하여 염장이, 옥천읍에서 군서면으로 넘어오는 고개에 위치한 말무덤까지 전쟁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이와 함께 군서면-옥천읍간 37호 국도가 휘도는 곳, 서화천변 용바위는 봉황이 놀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봉황대 아래 20여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말하는데, 서화천 깊은 물에서 살던 수천 년 묵은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어 승천하다가 사람에게 발견돼 떨어지면서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월전리 말무덤이 있던 자리는 이제 옥천군 공원묘지가 들어서 있고, 국궁터인 관성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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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군서면
최종수정일 : 2018.08.23